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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Flow

210918_팜가드닝_내 마음의 외갓집

  올해, 공대에서 조경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 만난 조경학은 자연을 사랑하는 나로서 굉장히 흥미로운 학문임에 틀림없었다. 자연과 인간이 어울러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개념을 배우는 것이니 말이다. 열정은 넘쳐났고, 배움의 갈망은 커져갔다. 하지만,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조경학과에서 배우는 것은 학문 그 자체일 뿐이라고 느꼈다. 삶 속에서 이를 느끼고 체험하기에는 한 없이 부족했다. 내 '손'으로 직접 정원을 만들어 보지 않는 이상 지금 배우고 있는 과목은 깊이 없는 지식으로만 남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인터넷 강의로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컴퓨터로 경관을 설계를 하는 것이 과연 자연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길일까?' "그렇지 않다." 깊은 고민 끝에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을 하려면 몸소 실험을 해야 했다. 그 길로 나는 여행을 떠날 준비하게 되었다.

https://blog.naver.com/wwoof_korea/222296157989

 

'우프코리아 팜가드닝 ' 우퍼모집

‘나만의 가든을 갖고 싶으나 땅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 타샤튜더 할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 ‘...

blog.naver.com

여행 1일차 아침

 

 

  비가 무수히도 내리던 늦여름의 때였다. 나는 우퍼(WWOOFer)*로 여행을 떠나왔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흙을 만지고 있었다. 길고 긴 장마에 하늘은 늘 어두침침했다. 그럼에도 구름은 함부로 그 미모를 가릴 수 없었다. 이곳은 영월의 '내 마음의 외갓집'이라는 농가 민박이다. 외갓집의 터줏대감인 김영미 선생님과 임소현 선생님은 15년 전부터 귀틀집을 지으셨고, 작물을 기르며, 정원을 가꾸신다. 두 분이서 실상 하시는 일이 셀 수가 없는데, 그 직업도 여러 가지시다. 건축가, 농부, 목수, 민박집주인, 정원사, 요리사 등등.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 있는가는 공부가 더 필요한 영역인 것 같다. 나는 이번 WWOOF의 팜가드닝 프로그램을 통해 영월과 평창에서 시골 살이를 만끽하게 되었다. 영월에선 2주간 가드닝 실습을 하고, 평창에서 1주일간 우핑을 하며 농촌 정원을 조성하기로 온 것이다. 이 3주간의 기쁨은 내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축복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준 말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우퍼* : 친환경적인 삶을 추구하는 농가에서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다. WWOOF라는 단체에서는 유기농가와 봉사다를 연결하는 운동을 한다.)

 

김영미 선생님(左), 임소현 선생님(右)
외갓집 본채(左), 파고라(右)
가드닝 스페이스(左), 텃밭(右)

  

"열심히 사는 것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다르다." by 김영미

 

 

  '다르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내면에서 툭 튀어나온 한마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이 말씀에 엄청난 힘이 담겨 있는지 느껴졌다. 당시 내 기분은 초자연적인 공감을 경험한 것 같이 보고도 믿을 수 없으며 너무나 생생히 와닿았다. 때론 나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후회는 없을지언정 의미 없을 때가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 생애를 돌이켜보았을 때 의미 없는 일이란 없었다.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 그 의미를 충분히 부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에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았을 때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로선 이 질문에는 함부로 확신을 가지긴 어려울 것 같다.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애매모호하다. 그 '의미'라는 게. 

 

 

  반면에 '열심히 산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오늘 하루 공부를 10시간 했어.", "10km를 쉬지 않고 달렸어.", "다른 사람들이 쉴 시간에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어." 등등. 대부분 수치적이거나 통계적인 근거로 "열심히"라는 말을 설명하곤 하다. 인정할만한 기준에 들지 못한다면. "열심히 살지 못하고 게으르게 보낸 하루였어."라고 낙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는 흔히 착각한다. '열심히' 살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거짓말한다. '열심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의 일생을 떠올려볼 때, 나는 '성공'에 속하고 싶어 열심히 사는 '척'하는 아이였다. 다른 이들보다 열심히 사는 척하는 나를 보면서 괜히 위안을 삼았다. '내가 누군가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겠지.'라며. 하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려고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열심히 사는 것과 의미 있는 것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의미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일까? 잠시 인생이 실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의미가 있는 일을 했음에도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고 다시 떠올린 김영미 선생님의 말씀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아. 너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아봐."

 

 

 앞으로 평생 나를 위로해주는 말일 것이다. 악착같이 발버둥 쳤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그 위안은 더 크다. "열심히 살지 말라"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일은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을 한 번 더 생각해볼 여유를 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번 여행으로 그 질문에 관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

 

 

  지극히도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답변이다. 김영미 선생님과 임소현 선생님은 자연에게 누구보다 겸손한 분이셨다. 정원을 꾸며주는 작물과 식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려 하셨다.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햇빛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른 식재들과도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아이인지 계속 공부하셨다. '자연'을 '자신'보다 높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자신의 정원 가꾸며 몸소 보여주신다. 내가 보았던 어떠한 정원보다 사랑스러운 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나는 그 정원에서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려 하지 않고 따르려 하는 두 선생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외갓집의 정원은 숲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 극상림(climax community)은 숲의 천이 과정 중 생태계가 기후조건에 맞게 성숙된 숲의 마지막 단계인데, 극상림의 형상이 정원에 적용된 것이다. 극상림에서는 다양한 수목들이 자라나지만, 그 상태가 가장 안정적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양수림, 음수림, 하부 식재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하며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숲의 모습이 아닌 숲을 이루는 원리를 차용하여 정원을 가꾸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저 식재를 심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심어야 하며, 어떤 식재와 심어야 하는지 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다 보니 자연에 대한 배움은 끝이 없을 수밖에. 

 

극상림(climax community)

 

 

   그 원리를 조금씩 이해할수록 바라본 정원은 곱디 고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들이었다. '자연을 더 알아갈수록 얼마나 더 아름다워 보일까?' 그 기쁨을 언젠가는 누리고 싶었다. 2주간의 실습 기간이 끝나갈 때쯤, 김영미 선생님께 "선생님은 꿈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한치의 고민 없이 들은 답변은 "없어. 이미 꿈을 이뤘는데, 무슨 꿈이 있겠어."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답변이다. 선생님을 볼 때면 늘 한계를 설정하지 않으시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려고 하셨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셨음에도 시간이 나실 때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읽으신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밀고 실천하신다. 어찌 보면 꿈을 이룬 사람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꿈을 이뤘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작 편안하게만 살려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하지만, 김영미 선생님과 임소현 선생님에게서는 눈을 씻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외갓집 정원

 

  그 이유는 '자연'을 향한 겸허한 마음이 대나무의 뿌리같이 깊게 자리매김해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자연을 대하는 '농부'가 얼마나 숭고한 직업인지 몸소 보여주셨으며 절기에 따라 자연의 움직임에 순응하며 사는 게 얼마나 힙한 삶인지 알려주셨다. 나는 어디에서나 자연을 가까이에 두고 살고 있지만, 어느샌가 삶에 자연을 분리시켜놓고 말았다. 그리고 시골에 가야만 자연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은 뗄 수 있다고 해서 뗄 수 있는 그러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가 자연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펙트이자 진리이다. '농부'만이 자연을 대할 수 있다는 편견은 내 안에서 깨트리고 싶다. 꼭 시골에 살지 않더라도 농부가 되지 않더라도 자연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삶이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을 만한 의미를 똑똑히 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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