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3주째 수도권 거리두기가 4단계로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원래 가려고 했던 '반쥴'이라는 카페도 일요일에 문을 닫아버렸다. 평일 낮이라면 북적북적한 종로 한 복판이 한적하다. 그래도 종로에 볼거리가 꽤 있어서 주말에도 꽤나 붐비는 곳인데, 정말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다시 골라서 간 카페에서 우리 셋만 한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요번에는 특히나 채꿀이 고생이 많았다.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가 정해져야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편하기 때문에 각본을 맡은 채꿀이 긴 시간 동안 공들여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왔다. 호이와 나는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그저 채꿀이를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채꿀이 혼자서 각본에 문외한인 사람 둘을 가르쳐주려고 준비해왔을 생각을 하니 동갑내기 친구임에도 존경할만하다.
사실 누군가의 스토리보드를 처음 보는 것이지만, 누가 봐도 잘했다고 인정할만하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디테일이 살아 숨 쉰다. 여자의 표정과 몸짓이 단연 최고다. 왜 이제야 이런 재주를 뽐내게 된 건지.ㅋㅋㅋ 이번 스토리보드를 보고 내가 어떤 걸 준비해야 될지 확신이 들었다. 이건 호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채꿀이가 구상해놓은 배경을 내가 Rhino(=3D modeling tool)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만나기 전에 대략적으로 구상한 게 있긴 한데, 채헌이가 스토리 상황을 조리 있게 잘 설명해줘서 머리에 바로 그려졌다. 호이는 워낙 감각적인 친구라 이 스토리를 보고 떠오른 상상을 영상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호이 혼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호이만의 상상력을 공유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내가 호이의 템포에 너무 서두르는 건가 싶기도 하다. 결과적으로는 내 생각을 뛰어넘는 것을 해낼 수 있는 친군데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릿속에서 떠도는 말이 글로 써지거나 완벽히 정리된 상태가 아니면 쉽사리 말하기 어려워했다. 지금이야 내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이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이겨냈는데, 순발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을 온전히 이끌어 내는 건 진짜 어렵다. 저번 주에 영월에 갔다 온 이야기를 채꿀이랑 호이한테 하고 싶었는데, 막상 기억이 안나 자세히 말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왜냐면 진짜 좋은 기억들이 많았는데. 이런 점에서는 채꿀한테 배우고 싶은 게 많다. 말을 한 번 하면 자기가 말하고 싶은 바를 끝까지 전달한다던가, 순간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 조리있게 말한다던가.(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는 유독 엄청나다) 채꿀이도 분명 우리와 같이 편한 사람들이랑 있어서 말을 잘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조차 잘 안되서 고충이 있어왔다. 다만, 이런 고충이 있다고 티를 내고 다니진 않았어서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여튼, 채꿀이 예전에 자신이 연출 방식에 대해서 정리했던 것을 나에게 설명해줄 때나, 이번에 스토리보드에 대한 상황 설명을 자세히 해줄 때를 보면 전문가다운 면모에다가 진심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모습이 있어 개멋있다. 내가 채꿀이에게 부러운 부분 중 하나다. 더욱이, 상대방이 잘 몰라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차근차근 설명해줘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이런 칭찬은 정작 채꿀이 앞에서는 남사스러워서 말 못 하는데, 글로 못다 한 말을 적어봤다.)
스토리보드가 있어서 대화는 순조로웠다. 고생해준 채꿀이를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더 분발해야겠다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래도 난관에 부딪힌 게 있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시나리오 전반적으로 바텐더의 감정이 드러나긴 하지만,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서 그 실마리를 풀어가는데 공을 들였다. 그냥 남자의 감정을 숨긴 채로 끝낼 것인가? 남자의 비밀을 추가시켜볼까? 남녀 관계는 정확히 어땠을까? 남자는 쓰레기인가, 사이코패스인가? 등등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채호동 모두 이 스토리를 정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 인정했고 말이다.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중요한 일. 채꿀이는 이 시나리오가 확실히 먼저 정해져야 다른 작업들(음악, 편집 기법, 배경)도 순조로히 정해질 것이라면서 강조를 엄청 해주었다. 그녀의 말에 고민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 흔적이 쌓여서 만든 그녀의 근거 있는 자신감이 우리 회의에 윤활제가 되어주었다. 애매모호하고도 뭉뚱 그려진 미래에 대한 상상도 필요하다만 때로는 바로 앞의 현실을 컨트롤할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정말 소중하다.
채호동 모두가 기력이 다해갈 참에, 시간을 정해서 막판 회의 딱 하고 핫도그 먹으러 가자고 졸랐다. 너무 배고팠다. 나는 그래도 아침을 먹어서 다행이었는데, 나머지 둘은 아침도 안 먹고 왔으니 얼마나 배고팠을까. (다음번에 간식거리 좀 들고 와야겠다.) 정말 다행히도 정해둔 시간 안에 마지막 스토리까지 정할 수 있었다. 원래 바텐더가 회상하는 장면을 넣기로 했는데, 여자의 회상 장면으로 변경했고, 마지막 장면에선 남자의 섹시한 분노로 결말짓는 것이다. 남주 얼굴은 브래드 피트가 아닌 스토리보드에 채헌이가 그려 넣은 '크리스 헴스워스'로 최종 결정했다. 깔끔한 마무리여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다음 모임까지 각자 해야 할 일을 부여해주었다. 나는 1학기 때 했던 모델링의 연장선으로 또 모델링을 하게 됐고, 호이는 혼자서 영상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결과물을 만들어 오기로 했다. 그리고 꿀이가 스토리 보드를 완성시키는 것을 끝으로 회의를 마치고 핫도그를 먹으러 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