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_9화
핫도그를 먹으며 종로 한복판을 돌아다녔다. 송해 거리, 낙원 상가(하필 상가 전체가 휴가라 다 닫혔다), 서울 레코드, 세운 상가. 이 친구들끼리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하면서 놀아다니는 게 그저 재밌고 행복했다. 특히나 서울레코드는 어린 아이가 해변에서 진주를 찾은 것 마냥 신기해하며 뛰놀았다. 내가 언제 레코드샵을 와보겠는가. 이 친구들 덕에 새로운 문물을 여럿 접해본다. 서로들 목적지 없이 배회하지만, 그 안에서 저마다의 재미를 누리는 게 마치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집에 와서도 이 친구들과 종로에서 놀던 그 시간이 귀중하게 느껴졌다. 지난 한 달동안 아이디어 회의만 했었지 어디를 놀러가본 적이 없었다. 종로를 잠깐 돌아다닌 게 셋이서 즐긴 첫 여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영상 제작을 목적으로 만난 사이다 보니 그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영상을 빨리 만들어보고픈 마음에 조급해졌던 것도 있었다. 시간은 한정적인데, 완성도의 기준은 높았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깨달은 건 아직 제대로 뭘 만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끼리 급해져봤자 좋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있다고 해서 빨리 일을 끝낸다고 해서 전혀 좋은 게 아니었다. 그저 남부럽지 않은 우리들의 청춘를 즐기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게 제일이다.
서울레코드에서의 기억은 채호동과 여유로이 놀러가고싶은 마음을 부추겼다. 각자 해야할 숙제는 미뤄두고, 놀러가기로 작정을 했다. 채꿀이도 우리끼리 놀고 싶다고 하길래 이때다 싶어 어떤 컨텐츠를 가지고 놀지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장소는 내 마음가는 대로 성수동으로 정했다. 이전에 호이랑 성수에 갔다왔었는데, 너무 겉핥기로 둘러봤던 게 아시워서 다시 가고 싶었다. 사실 어디로 놀러가든 다 괜찮았을 것이다. 다들 놀러가고픈 마음이 만땅 차있었기 때문에.ㅎㅎ
여기까지가 아마 호이랑 채꿀이 아는 사실이다. 이제 솔직한 썰을 풀자면... 본래에 나는 이벤트 장인이다. 오래 전부터 성수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큰 그림은 내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우리가 성수에서 만났던 ○○○○년 ○월 ○일은 바로 채꿀이 생일 전 날이다. 생일 당일 날 채호동 모임을 만나는 것은 약간 실례라고 생각해서 저번 종로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월 ○일날 만나기로 확실히 스케쥴을 잡았다. 생일과 가까운 날일수록 서프라이즈 효과가 더 돋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이 때부터 내 밑밥은 시작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이벤트를 한다고 하면 절대 대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굉장히 치밀하고도 세심하게 계획을 세운다.
생일은 주인공을 위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친구가 진심으로 좋아할만 한 것들을 염두해두고 세팅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친구도 좋고 나도 좋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는 이웃의 행복을 먹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 내 선을 넘는 행위만 하지 않으면 내 기분이 나쁠 일은 딱히 없다. 채꿀이가 예전부터 학교 다니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던 것을 잊지 않아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우리 학교에 데리러 가는 것 밖에 없는데, 그동안 명분이 없었다.
한창 채꿀이랑 뭐하고 놀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로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6시 이후에는 2명만 같이 다닐 수 있는데, 우리는 3명이지 않은가... 머리를 굴려봐도 같이 있을만한 공간이 없다. 그러다가 번뜩이는 생각이 들었는데, 바로 우리 '학교 설계실'에 가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교육 목적으로 적정 인원과 학교에서 회의나 과제를 해도 괜찮다. 그러니 6시 이후에도 학교에 있을 수 있고, 채꿀이에게 캠퍼스도 구경시켜줄 수 있으니 딱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성수에서 놀다가 저녁에 우리 학교로 가자고 제안하게 된 것이다.
뚝섬역에서 만나기로 한 당일. 나는 20분 일찍 도착했다. 케이크로 생일 파티의 피날레를 장식하려고 했는데, 케이크를 몰래 주문할 수 있는 시간, 공간,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았다. 뭐라도 사둘 시간은 만나기 직전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 케이크는 들고 다니기엔 너무 무겁고 서프라이즈의 의미가 사라져버린다. 작은 케이크를 가방에 넣는다고 한들 그 모양이 뭉게찔뿐더러 당장 내일에 케이크를 먹을 사람한테 전 날 케이크를 주는 것도 별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두었던 것이 맛난 식빵을 사는 것이다. 집에서 미리 촛불도 챙겼다. 왜냐면 이런 빵집은 빵을 사면 촛불을 따로 챙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 계획은 치밀했다. 채꿀이랑 호이는 어떤 생각으로 놀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 속은 이미 채꿀이 생일 파티 계획으로 꽤나 차있었다. 가방 안에 있는 빵이 최대한 모양을 흐트리지 않게 정말 조심히 다루었다. 평소라면 막 다루었을텐데 말이다.
호이에게는 4~5일 전에 채꿀이 생일 선물로 간단하게 케이크를 사주는 건 어떤지 미리 연락을 했었다. 그 후로 내가 생일에 대한 언급을 더 안 했는데, 호이가 까먹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그 직감은 맞았다. 성수에서 만나는 당일, 호이 얼굴을 직접 보니 분명 잊어버렸거니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호이까지 서프라이즈 해보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채헌이 생일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잠잖고 있었다. 깜짝 파티를 나 혼자만 아는 기분은 흥미진진하다. 그걸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있는 것은 좀 어렵긴 하지만, 이 또한 재밌는 추억이다.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빵은 사놨는데 어떻게 서프라이즈 해주지?', '빵이 잘못하다가 일그러지면 어쩌나?', '재밌어야 할텐데.', 분명 채꿀이는 내가 당장 내일이 채꿀이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에 섭섭해하는 것은 아닐까?'(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히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 혼자만 비밀을 아는 기분. 입이 근질근질 거린다. 앞서말했던 것 같이 이런 기분은 뒤에는 걱정꺼리들이 잇따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 치유를 성수에 있는 '대림창고'에서 받았다. 내가 반할만한 분위기, 그리고 디자이너의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디자인. 하나도 부족한 점 없이 나에게 온전해보였다. 오죽하면 눈을 감고 한 10분정도 대림창고 공간 자체를 외웠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성수의 대림창고, supy, samuel smalls를 지나 우리 학교에 오게 되었다. 사실 그러면 안 되지만, 학교 설계실에서 우리들끼리 맘 편히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옆 설계실에 사람들이 몇 명 있었던 것이다. 눈치가 보여서 영화를 보긴 어렵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영화 때문에 채꿀이가 무겁게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가져온 거였는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 불이 꺼진 깜깜한 설계실에 깜짝 생일 파티를 할 계획이었는데 그것도 처참히 무산돼서 꽤나 마음이 어지러웠다.
다음 화에 계속